조셉 파이파 교수가 본 ‘칼빈의 신학과 목회’①

[기독교보 2009-02-25 14:37:08]조회 : 165

 

칼빈, 사람들의 영혼․구원에 큰 관심

 

“장로교회의 교회정치 원리 발전…성경적”

 

 

한국개혁주의설교연구원은 지난 2월 16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삼양교회당에서 ‘칼빈의 신학과 목회’란 주제로 제32기 정기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세미나에서 주제 강의를 한 조셉 파이파 교수(미국 그린빌 신학교 학장)의 강의 내용을 요약, 정리했다. -편집자 주-

 

 

 

 

 

 

■ 칼빈의 생애와 사역…1년에 200회 강의·설교

존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피카르디의 작은 마을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칼빈은 파리대학 안의 몬테뉴대학에서 초대 교부들에 대한 강도 높은 훈련을 받기도 했다. 이 대학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알려져 있으며, 엄격한 훈련과 규율로 유명하다. 그 뒤 오를레앙 법학과에 받은 법학 훈련은 그의 신학적, 철학적 훈련과 함께 그가 완성된 개혁자로서 일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역할을 했다. 1529년 헬라어 학자이자 루터교도인 볼마르는 1529년 부르주 대학에서 칼빈에게 헬라어를 가르침으로써 신약성경을 헬라어로 읽고, 성경을 연구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조셉 파이파 교수

 

 

칼빈이 언제 어디서 회심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어려움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으려 했던 칼빈의 ‘과묵함’에서 기인한다. 파이파 교수는 “칼빈이 언제 갑작스런 회심을 했는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칼빈의 회심에 배경이 될 만한 몇몇 영향들을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칼빈은 조용한 학자로 살아가길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조용한 개인으로 살도록 나두지 않았다. 파이프 교수는 그의 사역의 첫 부분을 ‘방랑’이란 제목으로 다루고 있다(1533-1536). 칼빈은 신교도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프랑스를 떠나 독일어권 스위스 지역이었던 바젤로 여행했다. 거기서 1535년 기독교 강요 초판을 썼다. 기독교 강요의 원판은 프랑스 개신교도들의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쓰였다. 1536년 9월 15일 제네바 시 의회는 칼빈을 고용해 종교 개혁자 윌리엄 파렐을 돕도록 했다. 이에 파렐은 칼빈에게 ‘신령한 책의 교수’라는 직함을 주었고, 칼빈은 바울서신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성경의 원리들을 제네바 시민들의 생활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민들의 생활에서 개인적인 거룩함을 촉구했고, 교회가 스스로를 관할하고 다스릴 수 있는 자율권과 출교를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요구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개혁자들과 개혁에 대해 점점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1538년 4월 23일 칼빈과 파렐은 제네바에서 추방됐다.

 

이 때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마틴 부처와의 대화를 통해, 그리고 교회 정치와 예배에 대한 그의 원칙을 자유롭게 시행하면서 그의 교리와 실천을 보다 분명하게 발전시켰다.

 

1541년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온 직후, 제네바 시는 칼빈이 준비한 ‘교회법’을 받아들였다. 거기에서 칼빈은 장로교회의 교회정치 원리를 발전시켰다. 교회정치 영역은 칼빈이 종교개혁에 가장 독창적인 공헌을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교회법’에서 그는 교회 권징에 있어서 교회의 자율권을 확립했다. 파아파 교수는 “제네바에서 가장 큰 갈등들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순수성과 출교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549년 자유사상가들이 전권을 장악하면서 1553년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축출될 위기에 놓이게 됐다. 신학적인 갈등이 더 심각해지면서 자유사상가들은 거짓 교사들 편에 가담하곤 했다. 신학적인 논쟁의 두 가지 큰 주제는 칼빈의 예정설과 삼위일체 교리의 방어다. 1553년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자 세르베투스의 처형은 칼빈에게 정세 변화를 위한 촉매제가 됐다. 세르베투스 편에 선 자유사상가들의 평판은 땅에 떨어지고, 칼빈에 대한 새로운 지지층이 나타났다. 1555년 시의회는 교회에 출교권을 허용했다. 시의회가 개혁주의 법안을 지지하는 이들이 선출됨에 따라 같은 해 자유사상가들은 폭동을 일으켰으며, 도시에서 추방되어 귀환이 금지됐다. 이에 제네바는 종교개혁의 선두 도시가 된 것.

 

1559년 6월 5일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를 개교했으며, 이 아카데미는 뒤에 제네바 대학으로 승격됐다. 칼빈은 성년이 돼 건강이 나쁜 가운데에도 왕성한 서신 왕래, 1년에 200회 강의, 같은 수의 설교를 했다. 질병은 칼빈이 1564년 죽기까지 따라 다녔다. 파이파 교수는 “칼빈의 영향은 세계적인 동시에 포괄적”이라며 “그는 개혁주의 누룩이 퍼지는 모든 나라마다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 목회 사역…목양 접근 ‘교회법’에 종합

“칼빈은 목회 사역으로 인해 늘 쫓기는 생활을 했지만, 그의 목회적 돌봄의 사역은 그 모든 것들을 유지시켜주고 붙들어주는 접착체와도 같은 것이었다.” 파이파 교수는 “칼빈의 가장 큰 관심은 그 무엇보다 사람들의 영혼과 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목양을 위한 그의 접근은 ‘교회법’에 종합되어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1537년 완성됐으나 1541년이 되기까지 시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 문서는 성경적 교회 정치의 재발견의 초석이 됐다. 교회법에서 칼빈은 성경으로부터 4가지 직분 개념을 발전시켰다. 목사와 교사와 장로와 집사가 바로 그것. 목사는 설교와 교훈과 권면, 그리고 성례를 위해서 있으며, 교사는 신학을 강의하며,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고, 목회자 후보생들을 훈련시키는 자들이다. 장로들은 교회의 치리자들이다.

 

‘형제적 권고’ 또는 ‘훈계’는 칼빈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다. 교회 권징의 가장 상위 기관인 치리회는 12명의 장로들과 목회자들로 함께 구성돼 있다. 집사는 교회의 재산과 필요한 자들을 돌보기 위한 자들이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두 종류의 집사를 세웠다. 하나는 교회의 헌금을 비롯한 재산을 관리하는 집사들이고, 또 하나는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섬기기 위한 집사들이다. 이 직분들과 역할을 통해서 제네바의 목회적 돌봄(목양)을 구성했다.

 

권징의 문제는 시의회와 치리회 양쪽에서 진지하게 여겨졌다. 파이파 교수는 “칼빈은 권징이 효과적이 될 수 있으려면 설교와 교훈이 함께 수반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칼빈은 마태복음 18장을 따라서 권징의 세 가지 단계를 가르쳤다. 사적 권면, 증인이나 교회 앞에서의 (공적) 권면, 그리고 출교의 단계다. 권징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명예를 위해 △몸(교회)의 보호를 위해 △범법자의 교화를 위해 등 3가지 목적을 갖고 있다. 책망을 받는 사람, 출교되는 사람들이 그들의 비열하고 타락한 행동을 부끄럽게 여겨 회개에 이를 수 있게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칼빈은 그의 목회 사역에서 영혼을 돌보는 일에 자신을 헌신했다. 그는 성화의 위대한 목표는 “영혼이, 인간이 상실한 내지는 희미하게 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나타내는 순종과 거룩함과 선함을 점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또 하나의 주요한 목적은 ‘확신이 없고 괴로워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교훈하기 위해서다. 영혼들에 대한 칼빈의 (목회적) 돌봄은 특히 그의 편지들에서 엿볼 수 있다.

 

맥닐은 베누아를 따라서 칼빈에게 ‘영혼의 감독’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칼빈이 영혼을 지도하고 감독한 것은 성경에 의해서 잉태된 환경에서 글을 쓰며, 성경을 읽는 것과 묵상하는 것을 계속 촉구하고, 그의 성경적 신앙의 교리적 관점들에 대해 늘 강조했다는 점에서 성경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칼빈의 서신은 △개혁 촉진시키기 위함 △위로와 격려 △종교개혁 과정에서 방해로 고통 받거나 박해 당하는 사람들 격려 △양심상의 문제들에 대한 답과 조언 △믿음을 부인한 사람들을 견책 등 다섯 가지 항목으로 구분된다.

 

목회자 칼빈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파이파 목사는 “칼빈주의의 유산을 누리고 있는 우리들은 칼빈주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즉 우리가 교회 정치에 있어서 장로교회인 이유는, 우리가 칼빈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는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며 “질서정연한 교회와 우리의 직분자들을 훈련시키는 일 또한 필요하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경적으로 기능하는 당회와 집사들이 없이는 참된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없다. 파이파 목사는 설교만으로 종교개혁을 성취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교회 권징을 성경적으로 시행하는 데 더욱 힘쓰자.”며 “그리스도의 명예와 개교회의 건강과 죄인들의 교정은 권징은 얼마나 신실하게 시행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이국희 기자 cookie022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