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대접


신약성경 로마서 12장 13절에 보면 “송도(聖徒)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했고, 히브리서 13장 2절에서도, “손님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했다. 또 초기 기독교회의 직분자들(목사, 장로, 집사 등)의 자격을 말할 때도 “손 대접을 잘하는 이어야 한다”는 점을 중요한 기준으로(딤전3:2) 제시했다. 왜 성경은 손님 대접의 문제를 종교적 의무로 제시하고 있을까? 사실 이웃을 향한 조건 없는 배려는 기독교가 가르치는 중요한 가치였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이 되는 것으로, 저들 가운데 있는 연약한 나그네를 돌볼 책임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그래서 추수할 때에 모든 곡식을 다 걷어가지 말고 일부러 이삭을 남겨두라고 했고, 포도원의 과실을 딸 때도 다 따지 말고 일부를 남겨 두라고 했다(레19:9-10, 신24:19-22). 토지를 가지지 못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이방(외국)인들이 살아가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예수님도 가족과 친구들 외에 되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관대하게 영접할 것을 권하셨다. 그것이 누가복음 14장 13절이다. “잔치를 베풀 때는 가난한 사람들과 지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과 다리 저는 사람들과 눈먼 사람들을 불러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될 것이다. 그들이 네게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주린 자를 먹이고 병든 자를 위로하고 갇힌 자를 돌아보는 일은 다름 아닌 예수님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식탁으로의 초청은 사랑의 행위이자 이웃을 향한 배려였고, 그것은 기독교의 오랜 전통이었다. 오늘 날처럼 여행객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이나 식당이 없던 시절에 기독교는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보편적 사랑을 가르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잠자리를 제공하고 베고픔을 해결해 주는 육체적 필요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동시에 타인의 가치와 인간됨을 인정해 주는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즉 식탁교제는 사람들이 평등한 가치와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 크리소스톰 등 초기 교부들은 이 점을 강조했고, 16세기 루터는 핍박받는 신자들이 대접을 받을 때, 그것은, “하나님이 그 집에 계시면서 드시고 누우시며 쉬신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종교적 난민들에게 베푸는 손대접을 칼빈은 “신성한 형태의 손대접”이라고 불렀다. 이런 가르침에 근거하여 교회의 병원, 여행자 숙박소, 호스텔 등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구조변화, 핵가족 개념의 등장으로 상업화 되었고, 실제적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들은 교회의 관심에서도 멀어지게 된 것이다. 기독교의 손대접 전통은 17세기 이후 거의 사라졌다. 17세기 존 오웬의 지적처럼, “초기 기독교는 궁핍한 나그네들에게 베푼 식탁교제가 손대접이었으나, 이제는 친구, 친척, 친지들을 향한 접대로 대치되었다.” 예수님이 친척이나 친구 같은 이들을 두고 손대접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음을 고려해 볼 때, 본래적 의미의 이웃을 향한 배려가 오늘의 기독교회를 새롭게 만들어 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