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삼 박사의 생애와 칼빈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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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1-1. 교사

이근삼 박사는 관동대지진 사건이 발생한 1923년 10월 28일 부산 서구 부용동에서 이영식과 한귀련 사이의 3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신사참배 문제로 한국교회가 수난을 당하기 시작”한 1937년에 “부산의 부민[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제2상업학교(당시 5년제 중고등학교로 지금의 부산상고의 전신)에 입학”했으며 대동아전쟁 발발로 인해 예정보다 4개월여 앞당겨진 “1941년 12월 말”에 졸업했다. 졸업 동기 중에 일본 나가사끼로 유학 간 단짝 친구가 잠시 귀국하여 일본인 교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아 일본어 신약성경을 구입하여 읽고 부산 항서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장차 그를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하나님의 종으로 살게 한 계기다.

   졸업 후 그는 꼼짝없이 일본군으로 징용되어 갈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징용영장이 발부되기 전, “당시 보통학교 훈도(교사) 자격증시험”에 통과하여 발령을 기다리는 동안 다른 곳에 피신해 있었으므로 징용영장이 나왔을 때에는 전출자로 보고되어 징용을 면했다. 그리고 보통학교 제3종 훈도 채용에 지원 신청한 것이 허락되어 “거제도 옥포 보통학교”에 부임했는데, 그곳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했다.

 

1-2. 신학생

해방 직후 부산 대신보통학교로 전근 발령을 받았으나, 1946년 3월 부산에 “남조선대학교(현 동아대학교의 전신)”가 설립되자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동료 대학생들의 “저질적 언행에 대해서 마음이 불편하여 참을 수”가 없었는데, 그의 고백에 따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주의 종으로 부르시는 한 신호였다.” 결국 그는 1946년 9월 20일 부산 좌천동 금성중고등학교(전 일신여학교)에서 개교한 고려신학교의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하여 제1회 입학생으로 등록했다. 고려신학교 설립자이신 한상동 목사가 외삼촌이었기 때문에 먼저 그에게 자신의 신학교 입학 결심을 고백했으며 입학시험을 치도록 그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개교된 고려신학교는 2년의 예과와 3년의 본과 과정이었으므로 5년 동안 신학을 공부했다. 이근삼 박사는 하나님께서 “고려신학교를 한국교회와 한국 민족과 또 나에게 주신 것”이 “제일 큰 선물”이라고 고백하면서 신학교 시절의 배움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윤선 교수님을 통해서 칼빈주의를 배우고 성경과 해석학을 배우고 조직신학도 배웠다. 한부선 선교사님을 통해서 교회사와 설교학을 배우고 한상동 목사님의 로마인서 읽기와 분해, 실천신학을 배워서 확신을 갖게 됐다.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 교회와 성도, 목회와 설교를 배울 때마다 나에게는 항상 새롭고 감격적이고 새 생명을 주는 감동적 배움이었다.

 

1950년 6.25동란으로 중단되었던 신학교 수업은 이듬해 첫 학기에 재개되었다. 제1회 입학생들은 1951년 5월 27일 초량교회당에서 거행된 졸업식에서 5년간 공부하는 본과생 10명과 3년만 공부하는 별과생 15명을 합쳐 모두 25명으로 제5회 졸업생이 되었다. 또한 학창시절,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1948년부터 고려신학교 주최로 시작된 여름과 겨울 방학 수련회에서 행정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 수련회가 6.25사변 이후 조직된 “청년신앙운동(YFC)과 학생신앙운동(SFC)”의 모태였다. 당시 그는 오병세, 홍반식과 더불어 부산 시내교회 청소년들의 신앙을 훈련하는 일에 솔선수범하여 봉사했다.

 

1-3. 목사

신학교 졸업 후 1951년 9월에는 초량교회 주일학교 담당전도사로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그런데 9월 총회가 끝난 바로 그 주일 예배시간에 노진현 목사를 비롯한 총회총대들이 한상동 목사의 강단권을 박탈하기 위해 들이닥치는 바람에 교회는 혼란스러웠다. 결국 한상동 목사는 유감을 표하면서 자신이 물러날 것이니 한 달 간 말미를 주면 다른 곳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초량교회 문제는 한상동 목사가 모든 것을 양보함으로 해결되었다.

새로운 예배처소는 주영문 장로의 뒤뜰에 지어진 가건물이었는데, “우선 판자집을 짓고 아직 지붕을 올리지도 못한 채 10월 14일 주일에 초량교회당에서 예배 시에 다 모여 주일학교를 마치고 대예배를 드린 다음, 그날 주일 저녁예배는 새 장소에서 드린다고 광고하고 주일학교 학생들은 저녁부터 모일 장소로 안내되었다.” 바로 이것이 고신교단 부산삼일교회의 시작이었다. 초량교회 전도사로 부임했지만 본격적인 전도사 사역은 실제로 삼일교회에서 한 셈이다.

   당시 고려신학교 제5회 졸업생들은 전도목사로 9월 노회에서 안수를 받았지만 이박사는 자신에 대해 회고하기를 “나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9월 노회에 안수를 받지 못하고 다음 노회 시에 받도록 연기를 하였다.” 그는 목사안수 대신에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해 두셨던 배필”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녀는 “기도 많이 하고 은혜 충만해서 하나님께 몸 바쳐 일할 각오를 가지고 있는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 배필은 조영진 사모다. 그녀는 당시 삼일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찬양대원으로 봉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박윤선 교장의 주례로 1952년 1월 22일 삼일교회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목사안수는 그 해 9월 삼일교회당에서 개최된 고려파 총회에서 받았다. 설교실습 시험에서 고시부원들로부터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하듯 한 설교라는 호된 평가를 받았지만 결국 통과했다. 목사안수를 받았기 때문에 삼일교회에서 부목사로 담임목사인 한상동 목사의 목회를 조력했다. 총회, 노회 등 출타할 일이 많았던 담임목사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일은 쉽지 않았고 특히 담임목사 부재 시 맞이하는 주일은 감당하기에 너무 벅찰 정도로 분주했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기 전에 이미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 영어 과목을 강의했고 목사안수 받고 난 이후에는 박윤선 교장의 명령으로 히브리어 기초문법을 맡아 강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학 진행이 신속하게 이루어져 이 히브리어 강의를 오래하지는 않았다.

 

1-4. 유학생

고려신학교는 교수를 양성할 계획으로 본과 졸업생 가운데 홍반식, 오병세, 이근삼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려고 했다. 홍반식은 구약학을 전공하기 위해 칼빈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로, 오병세는 신약학을 전공하기 위해 훼이스신학교(Faith Theological Seminary)로 유학을 떠났고, 이근삼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를 지망했으나 학점을 보충하기 위해 고든대학교(Gorden College)가 있는 보스턴(Boston)으로 갔다.

고려신학교를 제5회로 졸업한 세 명의 동기생 가운데 이근삼 박사가 가장 먼저 해외 유학의 장도에 올랐다. 1953년 12월 16일 그는 미국상선을 타고 부산항을 출발하여 일본에서 2일 머문 후에 해를 넘긴 1954년 1월 2일에 샌프란시스코에 입항하였으므로 18일만에 도착한 셈이다. 그때부터 미국에서 5년 동안 머물며 유학의 길을 걸어갔다. 먼저 학점을 보충하기 위해 고든대학교에서 3학기를 수업했고, 휘턴대학교에 하기 대학코스 수업을 받은 후에 고든대학교에서 문학사(B.A.) 학위를 마쳤다.

   당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보다 훼이스신학교가 학적으로나 영적으로 더 낫다는 재정후원자 구래이 목사의 조언을 따라 훼이스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여기서는 고려신학교 졸업과 학위를 인정해 주되 2년을 수업하고 목회학석사(M.Div.)와 신학석사(Th.M.) 학위를 동시에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2년째 되던 해에 훼이스신학교는 이사장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박사와 교수들 사이에 분열이 발생하여 교수들에 의해 카버넌트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가 새롭게 설립되었다.

   지도교수를 따라 카버넌트신학교로 옮긴 후 이곳에서 1957년 5월 조직신학 담당교수 킬렌 박사(Dr. Killen)의 지도 아래 “루돌프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Rudolf Bultmanm's Kerygmatic Theology)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1년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변증학을 공부한 후에 박사학위 과정을 수학하기 위하여 네덜란드로 갔다. 1958년 8월 23일 뉴욕에서 네덜란드 여객선을 타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8일 만에 네덜란드 항구 도시 로테르담(Rotterdam)에 도착했다.

   암스테르담(Amsterdam)에 있는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에 1년 전액 장학생으로 왔으나 그의 생각으로는 그 기간이 공부하기엔 충분하지 않아 하나님께 3년만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는 응답되었다. 미국에서 만난 네덜란드 사람 블라아우 박사(Dr. G. A. Blaauw)가 소개해준 자신의 친구 바우터르스 목사(Rev. Douwe N. Wouters)를 만나게 되었는데, 바우터르스 목사가 자유대학교 총장 비서 뎅가르링크 박사(Dr. Dengarlink)에게 1년으로는 학위과정 공부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사정을 전하면서 좋은 대안을 마련해 달라 요청한 덕분에 자유대학교에서 2년 더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1년의 유학비용은 처외삼촌 김사엽 장로가 조달했다.

모니컨담(Monnickendam) 개혁교회의 목사 바우터르스 가정에 대한 이근삼 박사의 애정과 감사는 특별했다. 그는 회고하기를 “이 가정은 나의 은신처가 되고 나의 모든 도움이 되었다.” 이유는 이 가정이 1959년 1월에 어려운 형편의 한국인 유학생을 기꺼이 자기 집 하숙생으로 받아 선대했다는 사실 외에도 많다. 그 중에서도 예컨대, 바우터르스 목사는 결혼한 이박사가 홀로 지내는 것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안타까운 일로 여겨 교인들과 의논한 끝에 한국에 있는 부인을 초청하기로 하여 모금을 하고 네덜란드에서 부부가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모든 비용과 편의를 제공했던 것이다.

   조영진 사모는 1953년 12월에 헤어진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남편을 드디어 1961년 2월에 모니컨담에서 재회하는 감격과 기쁨을 누렸다. 1961년 여름에 바우터스 목사는 임지를 호른(Hoorn)으로 옮겼는데, 이 때 한국인 부부도 함께 데려 갔고 호른 교회의 도움으로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도록 각별히 보살폈다. 이곳에서 1962년 5월 30일에 “사랑하는 딸을 낳게 됐으니 이름을 ‘선화’(goodness of Holland도 되고, gift of Holland도 된다)라고” 지었다.

   자유대학교의 교의학 담당 교수인 베르카우어르 박사(Dr. G. C. Berkouwer)를 주임교수로 정했는데, 그의 지도로 신학석사과정(Doctorandus)을 무사히 마치고 학위를 받았다. 그에게 베르카우어르 교수는 서양신학, 특히 독일신학을 박사논문 연구 주제로 권장했지만, 박사학위 논문은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조카 요한 헤르만 바빙크 박사(Dr. Johan Herman Bavinck) 밑에서 엘랭틱스(Elenctics)를 전공하기로 했다.

   박사논문 방어식과 학위수여식은 당시 자유대학교의 강당이 미완성 상태였기 때문에 1962년 7월 13일 암스테르담의 어느 교회당에서 거행되었는데, 그 날은 자유대학교을 위해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 역사적인 날이었다. 왜냐하면 자유대학교가 설립된 이래로 한국인에게 박사학위를 수여한 최초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근삼 박사는 자유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 학자요, 네덜란드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한국인일 것이다. 그의 학위논문은 당시 자유대학교에서 유명한 두 학자 베르카우어르 교수와 묄러만(Meuleman) 교수의 극찬을 받았다.

   일본의 신도주의와 기독교 간의 상호 대립 관계를 다룬 이근삼 박사의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다음과 같다: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의 대결: 메이지 유신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1868-1945) 일본에서 기독교와 신도의 충돌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The Christian Confrontation with Shinto Nationalism: A Historical and Critical Study of the Conflict of Christianity and Shinto in Japan in the Period between the Meiji Restoration and the End of World War II (1868-1945) 이 논문은 1962년에 암스테르담(Amsterdam)에서 출간되었고, 1966년에는 미국에서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er에 의해 재출판 되기도 했다. 이 논문은 <이근삼 전집>의 제9권에 한글 번역본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근삼 박사는 1962년 7월 31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출발한 일본상선을 타고, 대서양, 지중해, 홍해, 인도양, 대만 해협을 건너 32일 만인 9월 1일 부산항에 도착함으로써 약 9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무사히 귀국했다.

 

1-5. 교수

이근삼 박사의 귀국은 홍반식 박사와 오병세 박사 보다 1년 정도 늦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곧장 감천에 있는 칼빈학원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 1960년 12에 13일에 이미 장로교 고신측과 승동측이 공식적으로 통합의 “취지 및 선언문”에서 “총회직영의 신학교로 일원화”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두 교단 간에 합동이 성사되었고, 이것을 근거로 1961년 12월 28일 고려신학교와 총회신학교의 교수들은 서울에서 가진 연합수련회를 통해 몇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서울 총회신학교를 본교로, 부산의 고려신학교를 분교로 운영한다는 것, 그리고 부산 분교는 더 이상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60년 합동할 때 부산의 고려신학교와 서울의 총회신학교를 “일원화”(一元化) 한다는 원칙은 1961년 총회에서 서울 총회신학교로 “단일화”(單一化) 한다고 결정함으로써 고려신학교의 폐교를 기정사실화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고려신학교는 1962년 3월 14일 “총회신학교 부산분교”라는 새로운 간판으로 신입생 없이 개학했다. 또한 안용준, 오병세 교수는 서울 본교인 총회신학교로 올라가 가르치는 반면에, 이상근, 홍반식 교수는 부산 분교인 고려신학교에 남아서 가르치도록 결정되었기 때문에 고려신학교는 교수의 수도 줄었다.

개학을 맞아 이러한 통폐합에 분개한 재학생들이 학우회를 소집하여 고신 존속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학생의 찬반 서명도 받았는데, 고신존속 찬성 53명, 중립 6명, 반대 6명의 결과가 나왔고 반대자들 중에는 광주신학 출신의 학생도 3명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재학생들은 당시 이사장 노진현 목사와 부산 분교장 박손혁 목사에게 학교 통폐합의 부당성을 호소하며 이의를 제기했고 “고려신학교 학우회”라는 명칭을 그대로 고수했다.

   1962년도 2학기에도 부산의 재학생들은 고려신학교를 지키고자 하는 자신들의 뜻을 꺾지 않았다. 그들은 제47회 총회가 끝난 후 1962년 10월 11일 학생총회로 모여 한 번 더 고려신학교 존속을 위한 진정을 하기로 진정서 작성위원을 선정하여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그런데 1962년 10월 17일, 고려신학교 설립자인 한상동 목사가 부산의 고려신학교에서 경건회를 마친 직후 갑자기 “고려신학교 복교 선언”을 해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돌발적인 폭탄선언이라 불릴만한 사건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이 복교선언의 결정적인 이유는 온갖 추측만 난무할 뿐,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이근삼 박사의 교수채용 문제가 그러한 폭탄선언의 결정적인 원인이었다거나 가장 중요한 배경이었다는 추측은 근거가 희박한 억측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1962년 9월 20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개최된 제47회 총회가 받은 이사회 보고서에는 “이근삼 박사를 신학교 전임 강사로 청빙하기로 교수회에서 제의한 것을 임명하기로 1962년 9월 21일자로 가결”했다는 내용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혁명”으로 불리는 복교 선언의 주요 원인이 승동측의 합동서약 위반과 관련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고신측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합동서약 위반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압축되는데, 총회와 총회신학교의 부패의 심각성과 정화 불가능성, 총회신학교의 교수회 회장 윤번제가 교장제도로 번복될 가능성, 신학교 교장 박형룡 박사의 삼천만환 사건에 대한 미해명 등이 그것이다. 부산노회는 1963년 8월에 발표한 환원취지문에서 가장 먼저 합동선서의 위반을 거론하면서 신학교 문제를 꼽았는데, “一元化를 2年이 못 가서 單一化시켰음”이 첫 번째 이유로 제시되었다.

   이처럼 이근삼 박사의 교수 생활은 초기부터 순탄치 못했는데, 그것은 교단과 신학교를 둘러싼 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신학교는 복교 선언 후 2달 정도 어수선하였으나, 12월 17일에 박손혁, 오병세, 이근삼 세 교수가 복교에 합류함으로써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는데, 이 일에 가장 큰 공로자는 이근삼 박사였다. 1963년 2월 25일에는 홍반식 교수가 합류함으로써 고려신학교는 당시 신학교들 가운데 학문적으로 최고의 교수진을 갖추게 되었다. 홍반식, 오병세, 이근삼 교수는 모두 고려신학교 제5회 동기생으로 서로 우애가 깊었고 장차 고신교단에서 동방 박사에 비유되는 “세 박사”(Doctor trio)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 세 교수는 “3인 공동성명서”를 내고 고려신학교를 함께 봉사하기로 함으로써 1963학년 신입생을 무사히 받을 수 있었다. 이근삼 박사는 1963년 신학기에 “변증학”을 개설하여 강의했다.

   1964년 고신총회를 통해 고려신학교는 총회직영신학교가 되었고 칼빈학원을 4년제 대학부 예과로 흡수 통합했다. 1965년에 총회는 직영신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총회유지재단을 새롭게 구성했다. 고려신학교는 대학부 예과를 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총회유지재단의 이름으로 학교법인 인가를 문교부에 신청하여 1967년 5월 1일부로 “학교법인 고려학원”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68년 2월 28일에는 학력인준대학인 각종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69년 9월 6일에는 대학동등학력 인정학교로 승인을 받았으며, 1970년 12월 22일에는 “고려신학대학”으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대학인가 과정은 학교 측과 송상석 목사 측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1969년에는 교수들이 총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신학기 개혁이 한 달 이상 지연되기도 했다. 또한 지난한 갈등과 반목의 결과로 1975년에는 경남노회와 경기노회 중심의 반고소파가 교단을 탈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초래되어 교단 분열의 위기를 맞기도 했다. 대학인가 전후로 한바탕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학교가 상당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근삼 박사는 교수로서 학교와 관련된 이와 같은 모든 불미스러운 사건들을 온 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대학설립인가가 난 1970년 전후가 아니라, 의예과를 증설하기 위해 “고려신학대학” 교명이 “고신대학”으로 변경된 1980년 10월 2일 이후였다. 이 당시 그는 고려신학대학의 학장이었다. 대학의 세속화를 우려하여 의대 증설과 교명 변경을 반대하는 교단 내 인사들도 있었으나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기독교대학 건설이라는 학장의 입장을 바꿀 수는 없었다. 1981년에는 의예과도 성공적으로 증설할 수 있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의예과 입학 자격은 원입교인 이상으로 제한되어야 했지만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불신자들에게도 입학을 허용하게 되었고, 1981년 신학기부터 불신 학생들이 대거 고신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했다. 5‧18 민주항쟁운동이 1980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는 반미의식이 팽배했다. 1982년 3월 18일, 반미의식에 물든 몇몇 고신대 학생들은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를 방조하고 광주학살을 용인한 것을 비판하면서 부산미문화원에 잠입하여 방화하고 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유인물을 살포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은 방화라는 폭력적인 테러 방법을 사용하고, 방화로 무고한 대학생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근삼 학장은 이 사건에 대한 모든 도의적 책임을 지고 학장에서 물러나 평교수로서 1982년 한 해 강의를 마친 후 1983년에 처음으로 안식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1984년 한 해를 휴직하고 1985년 1월에 고신대학으로 복귀했다. 1991년 8월 28일부터 고신대학의 학장으로 봉사하면서 도서관과 기숙사의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 3월 3일 개관식을 거행함으로써 마무리했다. 그가 학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인 1993년 3월 1일부로 “고신대학”이라는 교명을 “고신대학교”로 변경 승인을 문교부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그는 자연스럽게 고신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이근삼 박사는 “고려신학대학”이 단과대학인 “고신대학”으로, 그리고 다시 종합대학인 “고신대학교” 교명으로 변경 발전하는 과정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94년 2월 28일 총장 퇴임 및 명예교수로 추대되기까지 32년 동안 그는 조직신학자로서 교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수고를 다해 전력투구했다. 그는 고신대학교이라는 기독교대학을 세우는 일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쏟아 부었던 것이다. 32년간 자신의 교수 사역 가운데 가장 보람 있는 대표적인 일을 다음 네 가지로 회고했다: 32년간 후학들을 양성한 일, 인재양성, 대학발전에 참여한 것, 고신대학교를 위해 도서관과 기숙사 건축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

   총장 퇴임과 교수 사역 은퇴 직후인 1994년 3월 4일에 교육부 국민훈장모란장을 받고 도미(渡美)하여 재미 동부 고려신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995년 5월에 창설된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레스 지방의 가주 고려신학대학원으로 옮겼다. 이 학교는 7월 17일에 현판식을 달고 9월 25일에 개교식을 거행했으나 학생들에게 학위를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1998년에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인가를 받은 태평양침례대학교(Pacific Baptist University)를 인수하여 1999년 1월 1일자로 새로운 이사회를 구성함으로써 신학석사(M.Div), 기독교교육학석사(M.C.E)와 문학사(B.A) 등의 학위를 학생들에게 수여할 수 있게 되었고, 외국 유학생들에게는 I-20증명서를 발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학교는 1999년 6월 1일자로 “복음대학교”(Evangelia University)로 새롭게 명명되었고 이근삼 박사는 이 학교의 초대 총장으로 부임하여 2007년 1월 15일 향년(享年) 83세로 소천(所天)할 때까지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이근삼 박사는 조영진 사모와 결혼하여 슬하에 세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신철 교수, 이선화 권사, 이신열 교수가 그들이다. 장남 이신철 교수는 서울대와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가나에서 선교사로 오랜 기간 봉사하다가 모교의 선교학 담당 교수로 봉직한 바 있으며 영국 웨일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녀 이선화 권사는 부산대를 졸업했고 의사와 결혼하여 지금 아버지가 개척한 송도제일교회에서 권사로 섬기고 있다. 차남 이신열 교수는 서울대 입학하여 2학년이 되기도 전에 도미하였고 미국에서 화학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한 후 비브리칼신학교(Biblical Seminary)에 입학하여 신학을 전공하기 시작했으며 네덜란드 아플도른(Apeldoorn) 신학교에서 교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신대학교 교의학 교수이며, 개혁주의학술원 원장으로 재직한 바 있다.

 

2. 사상: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이근삼 박사는 한마디로 한국의 대표적인 칼빈주의자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외골수 칼빈주의자이다!’라고 말해도 괜찮겠습니까?”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또한 그의 신학교 동기이자 평생 동료 오병세 교수는 그를 “칼빈주의 신학자”로, 그리고 “인재양성의 산파역”을 감당한 사람으로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이박사님의 칼빈주의는 탁상공론에 머물지 않고 생활에 구체화되도록 강조하였으며 칼빈주의 문화관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이근삼 박사를 “개척자,” “신앙으로 양보하는 자,” “학자”로 소개한 오병세 교수에 의하면 “그는 칼빈주의를 강의할 뿐만 아니라,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박재영 목사에 따르면 그의 슬로건은 “개혁주의 신앙과 생활”이다.

   이근삼 박사는 칼빈과 칼빈 사상, 칼빈 이후에 형성된 신앙고백적 칼빈주의, 그리고 19세기네덜란드에서 형성되기 시작한 신칼빈주의 세계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한국에 소개한 최초의 학자라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순서상 이근삼 박사는 귀국 후 먼저 19-20세기의 칼빈주의 세계관과 철학에 대해 가르쳤고, 그 다음에 칼빈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를 소개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작성일이 1963년 3월 13일자로 되어 있는 그의 고려신학교 “변증학” 강의 친필 노트이다.

   이 노트에는 신관을 다루는 곳에서조차도 칼빈과 칼빈 사상에 대한 언급은  전혀 발견되지 않지만, 세계 3대 칼빈주의자 가운데 한 명인 자유대학교의 설립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그리고 자유대학교의 기독교 철학자 디르크 폴렌호픈(Dirk Hendrik Theodoor Vollenhoven. 1892-1978), 자유대학교의 법철학자 헤르만 도이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1984-1977), 남아공 포체프스트롬대학의 칼빈주의 철학자 스토꺼르(Hendrik Gerhardhus Stoker. 1899–1993) 등과 같은 학자들은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 “변증학” 강의 노트의 특이한 점은 칼 바르트(Karl Barth) 사상을 취급하는 내용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것은 파스칼(Pascal)의 사상이다. 아마도 이와 같은 구성적 특징은 “변증학”이라는 학과목의 특수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그가 귀국 후 가장 초기의 강의에서 소개한 학자들로부터 강력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배운 것이 바로 “칼빈주의”와 “개혁주의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이근삼 박사는 그들이 가르친 칼빈주의로부터 칼빈과 칼빈 사상 및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소개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는 화란에 오기 전 미국에서 웨스트민스터에 있을 때 반틸 박사로부터 세계적 칼빈주의 학자들, 특히 화란계통의 학자들을 소개받았다. 그들은 역시 자유대학교의 기독교 법철학자인 도이어베르트(Dooyeweerd)교수와 개혁주의 철학자인 폴렌호벤(Vollenhoven)교수, 남아공화국 포체프스트롬(Potchefstroom)대학교의 스톡(Dr. Stock)박사였다.

   나는 도이어베르트교수의 강의 시간에 찾아가서 강의를 듣기도 하고 그의 저서 ‘Transcendental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에서 영역의 주권사상을 배우고 기독교사상을 정리하기도 했다. 그리고 폴렌호벤교수는 은퇴하신 후라서 집에 방문하여 교시를 받고 그의 서적 “칼빈주의 철학과 철학사”를 읽으면서 새로운 눈이 뜨이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1975년에 남아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스톡박사님 택에 찾아가서 역시 칼빈주의 기독교철학에 관하여 담화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위의 학자들은 칼빈주의자들로서 동시대에 각각 연구하는 중에 일치된 기독교 시상을 얻게 된 분들이다. 이런 일들은 나로 하여금 개혁주의 세계관을 확립시키는데 크게 시야를 넓혀 주고 도움을 주어서 더욱 확신을 얻게 해 주었다.

 

   이근삼 박사의 제자이면서 동료 교수였던 이보민 박사는 그의 신학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주권의 신학’이라”고 평가하면서 이것이 이근삼 박사 자신이 자주 표현한 “하나님 중심 신학”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이보민 교수는 자신의 스승 이근삼 박사의 하나님 주권 신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스승님의 하나님의 주권 신학은 무엇보다도 그 주권의 ‘절대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원인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에만 의존한다는 이근삼 박사의 입장에 대한 해석이다.  둘째, “스승님의 하나님의 주권 신학은 또한 그 주권의 ‘우주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근삼 박사가 칼빈과 아브라함 카이퍼를 따라 일반은총을 중시하면서 전 세계 속의 기독교 문화 창달을 강조했던 것과 연관된 설명이다. 셋째, “끝으로 스승님의 하나님 주권 신학은 그 주권의 ‘인격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이근삼 박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특별계시인 성경을 인류에게 주시면서 그들에게 자신의 주권에 복종하는 도리를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조물주와 구원자인 자신을 찬양하도록 요구하시는 인격적인 창조주시라는 점에 대한 해명이다.

   이근삼 박사도 자신의 책에서 “칼빈주의 기본 원리”를 “칼빈주의자들의 생활 전부를 움직이는 것” 즉 “하나님 중심 사상”으로 정의한다.

 

칼빈주의 기본원리는 우주관의 기본원리를 말하는데 하나님과 피조물인 우주와의 관계를 잘 표현하는 술어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God's Absolute Sovereignty)이다. 그 뜻은 하나님은 최고의 입법자이시며 자연계와 도덕계와 만물에 대해서 절대적 지배권을 가지고 행사한다는 뜻이다. ...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하시는 우주 안에서 법과 질서와 조화의 아름다운 체계를 발견한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란 의미는 칼빈주의자가 생각하는 사상 체계의 기본 원리이다.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 하나님을 발견하며 하나님의 위엄을 완전히 이해한다. 워필드는 “칼빈주의자는 하나님을 본 자이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 더욱이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느낌과 또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이 죄인을 영접하신다는 놀람으로 충만한 자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에게 칼빈주의는 개혁주의와 결코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설명하는 칼빈주의 원리와 개혁주의 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 중심” 등으로써 동일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의 근본 되는 중요한 원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와 같은 개혁주의 근본 사상은 ‘하나님 중심’에 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신다.하지만 이근삼 박사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활동을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인 것으로만 제한하거나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내용을 충분히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칼빈주의 기본 원리는 아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개혁주의 교리들의 전통적 특수성격에 대해 이근삼 박사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로, 하나님 중심의 교회이다. ... 둘째로, 개혁주의 교회는 말씀 중심의 교회이다. ... 셋째로, 개혁주의 교회 정치제도가 특이하다. 개혁주의 교회의 정치는 교회는 그리스도만이 머리이고 모든 신자는 동등한 몸의 지체이다. ... 넷째로, 순수한 교리와 순결한 생활을 중시한다... 다섯째로, 개혁주의 신자는 큰 안목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진다. ...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을 ‘하나님의 나라’ 신학이라고 한다.”

   이근삼 박사는 “칼빈주의 체계를 칼빈의 종교 철학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며 “칼빈주의자”를 “칼빈 한 개인의 추종자”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성경적 의미에서 참 기독자로 생각”하고 “모든 인간의 철학을 배격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위대한 신관과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발견하고 선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근삼 박사에 따르면 “성경에 가르친 중심 교리에 합당한 무게와 가치를 두는” 것이 곧 “칼빈주의”이고, “모든 길에 하나님을 인식함으로써 모든 사람 특히 믿음의 사람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심을 인식하는 자가 칼빈주의자다.” 이근삼 박사는 칼빈주의와 칼빈주의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칼빈주의에 대한 벤자만 워필드의 이해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칼빈주의는 주로 신관과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관계를 특별히 취급한 포괄적 신학 체계를 말한다. 이 체계의 명칭 “칼빈주의”는 칼빈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 이유는 칼빈이 이 체계를 종합하여 포괄적으로 또한 성경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며, 어떤 특수인의 이름을 가지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한 것은 못되지만 칼빈이 성경적 사상 체계를 잘 세웠기 때문이다. 칼빈주의의 강조점은 성경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롬 11:36)고 하였는데 이것은 칼빈주의의 근본 원리를 말해주며 또 칼빈주의가 하나님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취급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칼빈주의자들은 언제나 그 사상 중심에 하나님으로부터 생각을 시작하고 하나님을 중심에 간직하려는 노력을 기도하면서 계속한다. 워필드 박사는 “이런 것들로부터 칼빈주의의 기본 원리가 우리에게 나타난다. 즉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보며 모든 발생되는 일에서 그의 뜻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인식하는 사람이며 기도로써 하나님께 대한 영적 태도를 가지며 구원의 모든 역사에서 인간 자신을 의존하는 흔적을 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만 자신을 맡기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미국의 칼빈주의가 17세기 도르트레흐트(Dordrecht) 총회의 결정인 돌트 신조 핵심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 칼빈주의 5대 교리를 떠나서는 생각하기 어렵듯이 이근삼 박사의 칼빈주의 역시 칼빈주의 5대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의 친필 강의노트 “The Five Points of Calvinism”에는 알미니우스주의 5대 교리와 칼빈주의 5대 교리가 영문으로 나란히 대조되어 있다.

 

Arminianism

1. Free Will or Human Ability

2. Conditional Election

3. Universal Redemption or

   General Atonement

4. H.S. can be effectually resisted

5. Falling from Grace

 

      Calvinism

      1. Total Inability or Depravity of Men

      2. Unconditional Election

      3. Particular Redemption or Limited Atonement

      4. Efficacious Call of the Spirit, [or] Irresistable Grace

      5. Perseverance of the Saints

 

이것은 다음과 같이 번역될 수 있는데,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전적 타락” 교리를 “인간의 전적 무능력”으로 이해한 것과 “제한된 속죄” 교리를 “특별구원”으로 정의한 것, 그리고 “불가항력적 은혜” 교리를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으로 설명한 것이 특징이다.

 

알미니우스주의

칼빈주의

1. 자유의지, 또는 인간의 능력

1. 인간의 전적 무능력, 또는 전적 타락

2. 조건적 선택

2. 무조건적 선택

3. 보편 구원, 또는 일반 구속

3. 특별구원, 또는 제한된 구속

4. 성령은 유효하게 거절될 수 있다

 

4. 성령의 유효한 부르심,

   또는 불가항력적 은혜

5. 은혜로부터의 타락

5. 성도의 견인

 

 

 

이근삼 박사는 칼빈주의 5대 교리 가운데 칼빈주의 핵심 교리 즉 칼빈주의 기본 원리를 두 번째의 선택론이 아닌, 네 번째의 은혜론, 즉 불가항력적 은혜로 본다.

 

위의 5대 교리에서 중심 되는 특징 원리를 하나 택한다고 할 때 그것은 예정, 선택 교리보다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일 것이다. 예정 교리를 알미니안주의나 칼빈주의에서 다 같이 말하는 것으로 단지 예정의 이유 개념에 차이가 있을 뿐이며, 개혁주의가 다른 체계에 반대되는 특징은 ‘유효한 은혜 교리’에 있다. 개혁주의는 특히 ‘은혜의 신학’이다... 유효한 은혜는 성령의 창조적 효력으로 새사람 되게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 근본 사상을 다음 세 가지에 포함시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객관적으로 말해서 기독교 유신론이다. 둘째는, 주관적으로 말해서 가장 순수하고 고상한 종교이다. 셋째는, 구원론적으로 말해서 복음주의적이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고, 하나님은 전부의 전부가 되심을 개혁주의자는 믿는다.

 

이근삼 박사에게 있어서 칼빈주의는 기독교 철학적 세계관이나 문화관과 같은 이론적 체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생활원리이기도 하다. 그는 이 칼빈주의적 생활원리를 세 가지 관계의 카테고리, 즉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對神關係), 이웃인 사람과의 관계(對人關係), 물질세계와의 관계(對物質關係)”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먼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엄연한 구별을 가지고 초월하여 높은 위엄 중에 계시나, 또한 하나님은 성령과 같이 만물과 직접관계”를 가짐으로써 “우리 인간과 직접 교제하시며 우리의 생활 전체를 그의 주권을 가지고 통치 섭리하신다”는 것이 곧 대신관계의 생활원리다.

   두 번째로, 대인관계의 생활원리란 “인간의 전 생활 분야가 다 같이 직접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남녀, 빈부, 강약, 우열을 막론하고 동일하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며 선악 간에 하나님의 직접 심판을 받게” 되지만 “인간에게 부여된 달란트의 차이나 의무상 차이와 순서적 차이”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권위에 각 개인은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회와 자연의 질서를 유지하게 되며 동시에 그 권위는 개인에게 부여된 자유를 유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사회 속의 “권위와 자유 사이의 균형”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 철학이 주장하는 각 생활 영역의 주권”과 연결된다.

   세 번째로, 대물질관계의 생활원리란 “인간은 그의 환경이 되고 있는 물질세계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환경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선하게 지어 놓으신 우주만물, 자연세계”이기 때문이다. “자연세계를... 하나님의 창조물로 인식하고 그 속에 창조 시로부터 부여된 모든 가능성(possibilities)을 찾아 개발 발전시켜서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이다. “이 문화적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생활영역을 초월하여 포괄할 수 있고 하나님과 직접 상종할 수 있는 종교적 초점인 중생된 심령이다.” 따라서 중생하지 못한 자가 수행하는 문화적 임무와 활동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배반적 문화를 형성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3. 저술

 

3-1. 저서

The Christian Confrontation with Shinto Nationalism. Amsterdam: Van Soest, 1962.

<조직신학 강의안 기독론>. 부산: 고려신학대학출판부, 1971.

<칼빈, 칼빈주의>. 부산: 고려신학대학출판부, 1972.

<조직신학 강의안 구원론>. 부산: 고려신학대학출판부, 1979.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5.

<칼빈주의 특성과 강조점>. 서울: 엠마오출판사, 1986.

<기독교의 기본교리>. 부산: 고신출판사, 1990.

<개혁주의 신앙과 문화>. 서울: 도서출판영문, 1991.

 

3-2. 역서

L. Doekes. Mordern Struggle Against the Truth of Scripture. <현대 성경관 비판>. 부산: 고려신학대학출판부, 1971.

Henry R. Van Til. The Calvinistic Concept of Culture. <칼빈주의 문화관>. 서울: 성암사, 1977.

 

3-3. 기념논문집

이근삼총장은퇴기념. <하나님 앞에서>. 부산: 고신대학교출판부, 1994.

이근삼 박사 사역 50주년 기념 논집.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서울: 총회출판국, 2002.

제1회 이근삼 강좌. <이근삼의 생애와 개혁주의 사상>. (고신대학교. 비매품), 2008.

 

3-4. 전집

이근삼 박사의 저술과 논문들은 10권의 전집으로 출판되었는데, “이근삼 전집 편찬위원회”가 2007년에 “생명의양식” 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개혁주의자 이근삼 전집>이라는 제명으로 편집 출판한 것이다. 각 권은 다음과 같다. 이 가운데 제9권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제1권. <칼빈과 칼빈주의>.

제2권. <개혁주의 신학과 한국교회>.

제3권. <개혁주의 교회와 목회>.

제4권. <개혁주의 신학과 현대신학>.

제5권.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1>.

제6권. <개혁주의 조직신학 개요 2>.

제7권. <개혁주의 신앙과 문화>.

제8권. <교리문답 해설>.

제9권.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의 대결>.

제10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참고자료: 학력 및 경력

 

1946.09.20.          고려신학교 개교와 함께 입학(예과 1학년)

1951.05.26.          고려신학교 제5회 졸업(예과 2년 + 본과 3년 과정 수학)

                        부산 YMCA 영어 강사 고려고등성경학교 강사

                        고려신학교 히브리어 강사

1951.07-1953.11.   부산 삼일교회 전도사 및 부목사

1954.01.20.          미국 Gordon College 전입학(Greek-Bible 학과)

1955.05.25.          Gordon College 졸업(B.A.)

1955.09.01.          Faith Theological Seminary Senior Class 전입학

1957.05.15.          Covenant Theological Seminary 졸업(M.Div., Th.M.)

1957.09-1958.05.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Graduate Studies in Apologetics

1958.09.              Vrije Universiteit 입학

1962.07.13.          Vrije Universiteit 졸업(Th.D.)

1962.12.15.          고려신학교 교수 취임

1966.03~1967.02.  고려신학교 교장

1971.03.              고려신학대학 교수

1971.12.              일본 고베 개혁파신학교 특강

1974.10.              제2차 일본 고베 개혁파신학교 특강

1974.07~09.         South Africa Potchefstroom University에서 연구 및

                        제1회 Reformed Higher Education Conference 참석

1978.08.              제2회 Reformed Higher Education Conference

                        at Calvin Seminary (Grand Rapids, Michigan) 참석

1979.04.24.

~1982.05.10.         고려신학대학장

1981.07.              제3회 Reformed Higher Education Conference

                        at Dort College 참석.

1983.03~1985.01.  Edinburgh University, Free Church College at Edinburgh,

                        Yale University 등에서 연구

1989.09.              총회교육위원회 위원장, 교사통신대학 제3대 학장 취임

1991.10.01.          교사통신대학 제5대 학장 취임.

1992.07.              성경적 재림관 정립을 위한 미국 및 캐나다 순회

                        신학 특강. 강사: 홍반식 박사, 이근삼 박사, 오병세 박사

1993.03.01.          고신대학교 총장 취임

1993.04.              제2차 성경적 재림관 정립을 위한 미국 및 캐나다 순회

                        신학 특강. 강사: 홍반식 박사, 이근삼 박사, 오병세 박사

1993.09.              성경통신대학 제2대 학장 취임.

1994.02.28.          고신대학교 총장 퇴임 및 명예 교수로 취임.

1994.03.04.          교육부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1994.03.              재미 동부 고려신학교 교수

1995.07.17.          가주 고려신학대학원 학장 취임

1999.01.01.          Pacific Baptist University 제3대 학장 취임

1999.06.01.          Evangelia University로 교명 변경 및 초대 총장 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