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예배를 허무는 추하고 악취 나는 예배

작성자: 황대우

 

기독교 예배란 그리스도 덕분에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적 행위를 의미한다. 예배의 대상은 오직 삼위 하나님뿐이시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은 모든 예배는 사실상 예배답지 못한 예배요, 부당한 예배에 불과하다. 물론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가 예배의 청중인 신자들을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청중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향유하는 것은 결코 간과될 수도 배제될 수도 없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다.

지금 우리는 ‘예배’라는 용어를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공적 예배’와 그 외의 예배로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공적 예배’란 개체교회가 전체교인을 예배의 자리로 불러 모아 다함께 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공적 예배는 일주일 가운데 하루 ‘주의 날’이라 부르는 일요일 오전과 오후 혹은 저녁에 드리는 예배와 기독교 절기에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 더 엄밀하게 따지자면 가능한 모든 개체교회 교인들이 참석해야 할 공적 예배는 주일에 한 번, 즉 주일 오전예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일 오전예배를 ‘대예배’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공적 예배는 예식이나 순서도 상당히 중요하게 취급된다.

개체교회의 공적 예배 이외의 모든 예배, 즉 결혼예배와 장례예배 등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특수 목적 예배는 사실상 ‘각종 예배’로 분류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주일 아침에 모이는 예배를 ‘대예배’라고 부른 것은 아마도 그것을 교회의 가장 중요한 공적 예배로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오전예배에 비해 오후예배는 교리교육이나 세례식 등과 같이 일종의 특수 목적과 연관된 예배일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제네바는 3-4개의 도시교회가 각기 예배시간을 달리함으로써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도록 배려했다. 초대교회의 예배 전통을 복원하려고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노력은 개신교회가 세워지고 17-18세기를 거치면서 오늘날과 유사한 예배 전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하지만 18-19세기의 교회가 대부흥을 경험하면서 전통적 예배 형식이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교회부흥은 딱딱하고 조용한 예배형식을 활기차고 감동적인 예배로 이끌었다. 그 결과 예배형식이 좀 더 다양하고 자유로워지면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중심의 예배보다는 예배를 드리는 인간 중심의 예배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예배에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과 예배를 드리는 신자, 양측 모두 중요하지만 동가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돌들을 통해서도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인간 즉 죄인이 예배자가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은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 은혜 받지 않은 누구의 예배도 하나님께서는 받으시기 않기 때문이다. 은혜 받은 자만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예배를 피 없는 제사, 즉 감사의 제사라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와야 한다는 뜻이다.

감사의 마음 없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자는 참된 예배자가 아니라 단지 예배를 보는 구경꾼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을 드리지 않는 구경꾼의 예배를 받고 싶어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누구든 참된 예배자가 되고 싶다면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세례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수밖에 없다.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면 예배의 자리에 빈 마음이 아니라, 회개하는 심령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기뻐할 것이다.

누구도 준비된 심령 없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회개하고 감사하는 심령으로 예배하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예비하신 더욱 크고 놀라운 약속의 은혜를 베푸시고 이 은혜를 받은 자들은 더 큰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한 주간을 살아낼 각오를 다짐하는 것, 이것이 곧 예배의 선순환일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참석이 일종의 습관에 불과하다면 그의 영혼은 이미 생기를 잃고 시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처럼 은혜에 대한 갈급한 심령이 없는 예배, 습관적인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을 마른 장작으로 만들기 십상이다. 예배 시간에 잦은 하품과 졸음, 습관적인 잠, 그리고 딴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현상은 대부분의 경우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 즉 은혜에 대한 간절함이나 절박함 없이 예배에 습관적으로 참석할 때 발생한다. 찬양할 때는 열정적인데 설교를 시작하면 곧장 단잠에 빠져드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들은 오늘날 주일예배가 이미 인간 중심적인 예배라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예배는 구경이 아니라, 참여다. 주일예배는 하나님께서 특정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을 한 자리로 초대하시는 영적 잔치다. 초대된 잔치 집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참여하는 것은 잔치에 초청한 주인을 무시하는 일이요, 큰 결례가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의 잔치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영혼의 잔치, 하늘 잔치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준비도 기대도 없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세요, 행위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에게도 가끔 은혜를 베푸시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거의 예외적이요, 결코 일반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반드시 주신 은혜를 감사할 뿐만 아니라, 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기대하는 마음, 준비된 심령으로 예배에 참석해야만 한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만 성취되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약속의 은혜를 가장 충만하게 누릴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다.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는 은혜의 유일한 시여자이시며 약속의 온전한 성취자이신 삼위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다. 찬양이든 기도이든 설교이든 모든 예배자는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한다. 예배에서 하나님 대신에 특정한 사람이 주목을 받을 때 그 예배는 이미 예배답지 못한 예배, 타락한 예배일 가능성이 높다. 예배 순서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양한 소리를 내지만 그 모든 소리는 오직 삼위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이 예배다. 각자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의 은혜는 폭포수처럼 그에게 쏟아 부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만이 진정한 하늘의 은혜다. 이런 점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예배자들은 설교자, 예배인도자, 찬양대원, 찬양인도자, 대표기도자 등과 같이 예배 순서를 맡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배를 위해 준비한 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이 아닌, 청중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이 예배를 예배답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예배를 허무는 독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상 그것은 사람을 즐겁게 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려는 바벨탑 증후군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은혜란 결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치 그것이 가능기라도 한 것처럼 화려한 마술을 부리고 싶어 안달한다. 예배에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기 위한 도구와 수단에 불과하다. 예배의 은혜는 오직 하나님께 집중할 때만 향유할 수 있는 삼위 하나님의 행위이다.

예배에서 어떤 순서를 맡은 자이건 마치 자신을 하나님과 청중 사이의 중재자인 것처럼 착각할 때 그는 곧장 중세의 사제나 부제로 전락할 뿐만 아니라, 예배를 우상숭배의 자리로 변질시키는 주범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 순서를 담당한 사람들이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예배에서 맡은 자신의 임무 수행에 대한 평가를 하나님이 아닌, 청중에게서 듣고자 하는 자세일 것이다. 칭찬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모든 예배 요소는 아름답고 거룩한 예배를 허물어버리고 대신에 하나님께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강탈하는 행위의 추하고 악취 나는 예배로 변질시키는 주범이다.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 주목하는 예배가 되게 하라. 그러면 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이 은혜를 향유하는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날 것이다. 예배의 주인은 삼위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나머지는 모두 예배자일뿐이다. 설교도 기도도 찬양도 헌금도 특별한 사람의 예배 행위이거나 모든 예배자의 개별적 예배 행위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모두의,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거룩한 공동체적 예배 행위다.

*이 글은 인터넷신문 "개혁정론"의 기획기사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