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을 역임한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개인적 친구였지만 그 역시 ‘계승법’을 인정하지 않아 체포되었고 1535년 7월 6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던 당대의 특출한 학자였는데 투옥기간 중 ‘계승법’에 서명하라는 딸의 간청을 받고 “나는 이제까지 타인의 등에 나의 양심을 짐 지운 일이 없었다.”는 말로 거절하였고, 재판정에서는 자신은 “국왕이 교회의 수장임을 부인한 적이 없다.”고 말하고 “단지 이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는데, 누군가가 무엇을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없다.”고 스스로 변호하였다고 한다. 그는 피셔가 처형된 후 꼭 2주일 만에 “국왕의 충실한 종복, 그러나 그보다도 신에게 충실한 종복”이라고 외치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처형된 후 400년이 지난 1935년 가톨릭교회는 피셔와 토마스 모어를 공식적으로 성자로 축성하였다.
영국교회의 형성
여기서 헨리 시대의 종교개혁, 아니 종교적 입장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수장령’을 발표하고 로마 가톨릭과 분립한지 약 2년이 지난 1536년 7월에 성직자 회의를 통해 채택, 반포된 ‘10개조’(Ten Articles)에서는 루터주의 쪽으로 약간 기운 듯했다. 일례로 성례에 대한 조항을 보면 오직 세례, 성찬, 고해성사만을 언급하면서도 가톨릭이 인정하는 다른 4성례의 합법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또 성찬관에 있어서도 루터의 공재설(共在說)로도 해석할 수 있고, 화체설(化體說)로도 해석할 수 있는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그리고 교회 내부에 있던 미신적 관습의 남용에 대한 경고는 있지만 성상이나 성골 숭배는 폐지되지 않고 있었다. 파커(T. M. Parker)의 지적처럼 ‘10개 조항’은 “교묘하고도 모호한 최초의 문서”였다. 말할 것도 없이 이 문서는 정치적 배려의 결과였다. 당시 황제 칼 5세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동맹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루터측의 개신교 군주들의 협조가 필요했으므로 루터파와 가까워진 것처럼 모호한 입장을 취했을 따름이다.
1539년에는 ‘6개 조항법’(Act of Six articles)을 가결하였다. ‘6개 조항법’에서 화체설을 지지하고, 성찬에서는 떡만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성직자의 독신생활, 개인미사, 고해성사 등을 강조하였다. 즉 이전의 가톨릭 교리가 그대로 적법한 것으로 강조되었고 교황의 최고 우위성만이 제외되었을 뿐이다. 즉 이 문서는 헨리와 영국교회가 친가톨릭적으로 변화된 신학입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 또한 정략적 목적이 있었지만 영국내의 루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법은 가혹하리만큼 엄격하였는데 화체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화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독일 개신교의 도움이나 지원이 필요 없게 되자 가톨릭 교의를 더욱 확고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동안 친 독일(루터파) 정책을 주도하며 헨리를 보좌하였던 크롬웰은 반역죄로 고발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1540년 7월 28일 처형되었다. 1543년에는 「필요한 교리와 기독교인의 박식함」(The Necessary Doctrine and Erudition of a Christian man)이란 책을 출판토록 하였는데, ‘왕의 책’이라고도 불린 이 책에서는 명백하게 반(反)개신교적 입장을 보여 주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볼 때 헨리 8세의 교회분립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 개혁이나 복음주의 운동으로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헨리 치하에서는 영국 교회가 가톨릭회로부터 분립했을 따름이지 교회는 개혁되지 못했다. 다소 모순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헨리는 영국의 로마 가톨릭교회를 원했던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일은 헨리 시대에 성경이 영역(英譯)되었고 누구든지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1535년 말 커버데일(Coverdale, 1488~1596)에 의해 커버데일판(Coverdale Version)이 출판되었다. 이 번역본은 성경을 번역한 죄로 처형된 틴델의 틴델역(Tyndale's Version, 1524~1534)의 수정본에 지나지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허용된 최초의 영역 성경이 되었다.
1537경에는 메튜성경(Mattew's Bible)이 출간되었는데 캠브리지 출신으로 윌리엄 틴델에 의해 개종한 존 로저스(John Rogers)가 메튜란 필명으로 영역, 출간한 것이었다. 그는 후일 메리 여왕 치하에서 첫 순교자가 되었다.
1539년 4월에는 커버데일이 메튜성경을 수정, 편집한 ‘대성경’(Great Bible)이 출간되었는데, 이 성경은 크롬웰의 강력한 후원 아래 이루어졌고, 영국교회의 공식 성경이 되었다. 이제 영국인들은 누구나 성경을 소지하거나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영국에서의 진정한 개혁을 위한 작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헨리 8세의 결혼생활
다시 헨리의 결혼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이후의 변화에 대해 잠시 언급해 보자. 헨리는 케더린과 이혼하고 1533년 1월 앤과 결혼하였으나 앤은 딸 엘리자베스를 낳았을 뿐 후사가 될 아들을 낳지 못했다. 결국 왕의 애정은 식어져갔고 앤은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간음의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다. 이번에도 크랜머는 침수된 앤의 은밀한 이야기를 이유로 왕과 그녀와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었기 때문에 케더린의 소생 메리(Mary)처럼 엘리자베스도 서자가 되었다.
며칠 후 왕은 백의를 입은 채 제인시머(Jane Seymour)와 세 번째 결혼을 하였다. 제인 시머는 후일 에드워드 6세란 이름으로 왕위에 오른 아들을 낳았으나 산욕열(産褥熱)로 곧 사망하였다. 왕비가 사망하자 전부터 왕을 루터파와 접근토록 친독일 정책을 옹호하던 크롬웰은 당시 영국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여 독일 클레브가(家)의 앤(Anne of Cleves)과 정략결혼을 하도록 주선하였다. 이것이 왕의 네 번째 결혼이었다. 이 책략가는 중매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하려고 하였으나 그녀가 왕의 총애를 얻는데 실패하자 크롬웰은 생명을 대가로 치르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처럼 크롬웰은 반역죄로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왕의 다섯 번째 왕비는 케더린 하워드(Catherine Howard)였는데 그녀도 간통죄로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왕의 여섯 번째 왕비는 케더린 파(catherine Parr)였는데 그녀는 비록 처형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왕보다 장수하였다.
이와 같이 헨리 8세는 결혼생활이 복잡하였다. 그는 여섯 번 결혼하였는데, 이 중 두 명은 이혼을 당했고 두 명은 처형되었고, 한 명은 해산때 사망하였고 나머지 한 사람은 사형령이 내려져 있었으나 왕이 먼저 죽음으로써 왕보다 오래 살게 되었다.
헨리 8세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고 많은 가톨릭교도를 학살했는가 하면 완전한 개혁을 요구하던 신교도들을 처형하였다. 런던탑의 단두대와 스미스 필드(Smith field)의 화형장은 그의 통치의 속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증거들이다.
두 왕비가 처형되었고 왕의 정책을 수행했던 크롬웰도 처형되었을 때 왕의 총애를 받고 1533년 3월 30일 켄터버리 대주교로 임명된 크랜머까지도 처형의 위험을 느끼고 있었으나 헨리 8세는 자기처럼 무서운 왕을 순진할 정도로 신뢰하고 있던 이 사람에게만은 진실한 애정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1509년 18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38년간의 통치를 끝내고 1547년 크랜머의 품 안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이제 헨리 8세의 시대는 끝나고 그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므로 에드워드 6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